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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15. <부정공>학헌공휘종화가장(鶴軒公諱鍾華家狀)
1. 문헌 목록 〉22. 22世 〉17. <부정공>정헌공휘종윤묘갈명(靜軒公諱鍾閏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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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귀헌공휘종호가장(龜軒公諱鍾琥家狀)
龜軒公諱鍾琥家狀 公諱鍾琥初諱鍾浹字呂重號龜軒居九龜山下而慕仰龜山南軒之學故扁焉高麗玉川府院君諱元吉爲貫鄉之祖是生諱瑜以前副正我 朝固守罔僕之義並旌忠孝禮葬爼豆副正孫諱智崙察訪四昆季友于故亭曰相好察訪孫諱大春號三灘蔭校尉乙巳士禍後不求聞達與金河西白玉峰兩先生講磨漾碧亭三灘子諱懋號撫松亭以經學薦除禮賓寺參奉孫諱時聖號觀水亭通德郎前後喪居廬事季父一如事親載三綱錄諱維綱之藩泰望生員崇夏應淳邦根觀燁自七世至所生祖也諱之珣重望器夏觀瀾亭聖淳澤根聾隱馨燁自六世至所後祖也己以孝學之聞人生養來往煩不盡錄考諱憙奎以諱觀燁子出爲叔父諱馨燁后孝友而善書學妣利川徐學演女掌令甑后有婦德以 純廟乙未九月二十七日子時生公于南平鐵冶坊内洞里之外第天姿實質性行淳厚自在幼冲大異凡孩動止有常端雅而無雜戯長者有命無或違越出而得一味之甘則不先入口懷而献之聾隱公内外與生王母皆奇愛之九歲慈患轉劇憂形憂色及其皐復擗踊哭泣如老成人見者莫不嘖嘖專意聖學於四子之書及其三經淹貫熟復眞積力求以窮理正心克己復禮爲一身之準則一日謂諸生曰士生一世非但固守林燓杜門求志當廣遊四方得見當世有德君子長我識見博我聽聞然後庶可免孤陋之嘆矣時則有若任皷山洪梅山李華西宋守宗齋奇蘆沙諸先生而家運不幸甲子二月二十七日有志末就而沒壽才三十舂者不杵耕者停役莫不悼惜公娶慶州鄭在衡女吏曹判書知年后旡育繼配延安季昌九女判書貴山后性行貞淑事君子以敬公病革思其不起謂夫人曰望七重堂誰可奉之四歲嬰孩誰可養之勿思不孝不慈之人而期於寬抑仰事俯育保全殘門都在於夫人云故及其喪哀痛不己成服後因舅姑之艱勸強飲糜粥内而自訟曰吾若下從而不奉不養則非徒爲不孝不慈亦違亡夫之重托而豈不爲不烈乎遂絶夜哭每慰喪明之懷以短衣幣裳出入於鼎爼之間以供甘旨與娌同處一室撫育孤兒以禮終喪丁卯當舅艱子基永年甫七歲初上學而穎悟居承重喪見者莫不嘆尚孺人之敎導而庶可慰公泉臺之遺憾矣戊寅遭姑憂基永成長己十八歲居喪如儀常以麻枲繭綿暫不釋手調度稍饒養其王舅姑必有酒肉以終其天年又與娌愼氏守其氷玉松栢之操者皆五十星霜而沒於癸丑與夫子同忌年七十六而與王考同壽若非孝烈之天感烏能如是哉公有一男曰基永承襲庭訓善事皇祖皇母生死盡禮侍奉偏慈養其志體於叔父母喪棺槨衣衾出力營辦其他睦婣任恤人無不感服基永娶議官星山李斗淳女文景公稷后亦以孝聞只有三女長適鄭海國寅城府院君澈十世孫次適崔成壽砭齋是翁后次適黃華周武愍公進十二世孫又再娶于咸安尹銖哲女有一男三女皆幼嗚呼以若公之至孝如同萊子之壽則必有弄雛舞彩之樂又使其學考德問業於長德之門則生當有賢哉之稱死其無喪予之嘆哉何豊於德而嗇於年此古人所謂氣消者數局而然歟天之速奪其或爲修文郎而然耶基永常恐事行之泯湮累懇托故忘儹謹狀以竢後之立言君子 從姪 學洙 謹撰 귀헌공휘종호가장(龜軒公諱鍾琥家狀) 공의 휘는 종호요, 초휘는 종엽(鍾浹)이며, 자는 여중(呂重)이고, 호는 귀헌이다. 구귀산 아래 살며 귀산 남헌의 학문을 숭상하고 사모한고로 현판하였다. 고려 옥천부원군 원길(元吉)을 관향의 선조로 삼고 생휘 유(瑜)는 전부정으로서 조선에 들어와 굳게 절의를 지켜 충효를 아울러 정포하고 예장 석채하였다. 휘 지륜(智崙)은 찰방으로 四형제가 우애 독실하여 정자를 지어 상호로 현판하였다. 휘 대춘의 호는 삼탄인데 음교위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뒤에 현달을 구하지 않고 김하서·백옥봉 선생과 더불어 양벽정에서 도의를 강마하였다. 휘 무(懋)는 호가 무송정인데 경학으로 예빈시 참봉에 천제되었으며, 휘 시성(時聖)의 호는 관수정이요, 통덕랑인데 전후상에 시묘하고 계부를 어버이같이 섬겨 삼강록에 등재되었다. 휘 유강(維綱), 지번(之藩), 태망(泰望), 숭하(崇夏), 응순(應淳), 방근(邦根), 관엽(觀燁)은 七세로부터 소생 조요, 지순(之珣), 중망(重望), 기하(器夏), 성순(聖淳), 택근(澤根), 형엽(馨燁)은 六세로부터 소후조이다. 효학의 영문과생 양가 왕내는 번거로와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고의 휘는 희규(憙奎)인데 관엽의 아들로 숙부 형엽의 후사로 출계하여 효우하고 글씨와 학문을 잘했으며, 비는 이천(利川) 서학연(徐學演)의 따님으로 장령(掌令) 증(甑)의 후손인데 부덕이 있었다. 순조(純廟) 을미년(乙未年一八三五) 九월 二十七일 자시에 남평 철야방 내동리(南平鉄坊内洞里) 외가에서 공을 출생하였다. 천자가 순실하고 성행이 순후하여 어려서부터 범상한 아이와 달랐다. 행동이 단정하여 어른의 명령은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먼저 먹지 않고 싸가지고 와서 들이니 농은 공 내외 및 생왕모가 다 기특히 여겨 사랑하였다. 九세때에 자친의 병세가 위독하니 근심한 얼굴을 가지더니 운명하자 끌어안고 뛰며 애곡하기를 노성한 사람같이 하여 보는 자마다 큰 소리로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성학 사자(四子)의 글에 뜻을 온전히 하고 삼경을 오래 관통하여 여러번 반복하며 참으로 힘을 써 구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 하며 몸의 사욕을 이기고 예를 회복함으로서 일신의 준칙을 삼았다. 하루는 여러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비가 일생에 다만 굳게 林泉만 지켜 문을 닫고 뜻을 구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넓게 사방에 노닐며 당세 유덕군자로 나보다 식견이 높고 문견이 많은 자를 만나본 연후에 가히 고루의 탄식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당시에 皷山 任憲晦 洪梅山 華西 李恒老, 宋守宗齋, 蘆沙 奇正鎭등 여러 선생이 있었는데 가운이 불행하여 갑자년(甲子年一八六四) 二월 二十七일에 향년 三十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방아찧는 자 절구질을 아니하고 밭가는 자 갈지 아니하며 슬퍼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부인은 경주(慶州) 정재형(鄭在衡)의 따님으로 이조판서 정지년(鄭知年)의 후소인데 아들을 기르지 못하였고 계배는 연안(延安) 이창구(李昌九)의 따님으로 판서 이귀산의 후손인데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여 군자를 공경으로서 섬기고 공이 병세가 위독함에 일어나지 못할 줄 짐작하고 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七十을 바라보는 조부를 누가 봉양하며 四세의 어린 아이를 누가 기를고 불효 불자한 사람이라 생각말고 기어 관억하여 우러러 섬기고 아래로는 아이들을 길러 잔약한 집안을 보전해 달라 하였다. 상사를 당하자 애통해 마지 아니하며 성복 후에 시부모의 간권에 의하여 억지로 미음을 마시고 마음으로 타일러 말하되 내가 만을 따라서 죽고 받들지 않고 기르지 아니한즉 불효 불자만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망부의 중한 부탁을 어기니 어찌 烈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마침내 밤 울음을 끊고 매양 상명의 슬픔을 위로하고 짧은 옷과 떨어진 치마로 부엌에 출입하며 단 반찬을 장만하고 동서로 더불어 한 방에 거처하며 어린 아이를 어루만져 기르고 예로서 三년상을 마치었다. 정묘년(丁卯年一八六七)에 시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아들 기영(基永)이 나이 겨우 七세에 처음 학당에 나가 영민하고 承重 거상을 예제에 따라 행하니 보는자 유인의 교도를 높히 감탄 아니한 자 없고 거의 공의 황천의 유감을 위로했다 하였다. 무인년(戊寅年一八七八)에 시모 상사를 당하여 기영(基永)이 이미 성장하여 十八세라 의절에 따라 거상하며 침선 방적으로 주야 근속하여 가산이 조금 넉넉함에 그 왕구고를 반드시 술과 고기로서 봉양하며 그 천년을 마치게 하고 또 동서 신씨로 더불어 빙옥 송백의 정조를 五十성상을 지키고 계축년(癸丑年一九一三)에 별세하여 부자로 더불어 제사날이 같고 七十六세로 왕고로 더불어 수한이 같으니 만일 효열의 천감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공은 一남이 있었는데 기영(基永)은 정훈을 이어 받아 황조 황모를 잘 섬겨 생시와 사후에 예를 다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그 뜻과 몸을 봉양하며 숙부모 상사에 널과 수의를 힘을 다하여 판출하고 기타 친척과 궁한 사람 구제에 감복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기영이 성산(星山) 이두순(李斗淳)의 딸을 취처하여 효도로서 령문이 있었는데 다만 三녀를 두어 인성 부원군 鄭徹의 후손 정해국(鄭海國), 폄재시옹의 후손 최(崔成壽) 무민공 진의 후손 황화주(黃華周)에게 출가하였으며 또 함안(咸安) 윤수철(尹銖哲)의 딸을 재취하여 一남 三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었다. 아, 공과 같은 지극한 효도로서 노래자의 수를 하였으면 반드시 손자도 보고 채무의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요, 또 그 학덕으로 하여금 대선생 문하에 수학하였으면 생시에 마땅히 어진 사람의 칭호가 있을 것이고 사후에는 유덕한 사람이 죽었다고 탄식이 없었겠는가. 어찌 덕에는 넉넉하고 수에는 인색한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정기가 다하고 운수가 없어 그런 것인가. 하늘이 빨리 데려간 것이 글을 닦는 사나이를 만들려고 그런 것인가. 기영이 항상 사행이 산실될까 걱정하여 거듭거듭 부탁한 고로 참월함을 잊고 삼가 가장을 지어 후일 입언 군자를 기다림. 종질(從姪) 학수(學洙)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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